나의 이야기

심양& 단동 [ 2012.6.6~10 ]

캐나다버디 2012. 6. 15. 15:03

 중국 심양을 다녀왔습니다...

 

  최근 세계 최강국으로 폼잡던 미국이 몰락하면서 무섭게 성장한 중국이 넘버투(G2)의 지위에 올라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변화시키고 있다.

역사이래 중국에 강력한 통일왕국이 건설되면 반드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자신들의 발 아래 놓으려고 했고

거부하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여 짓밟았다.

한무제,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고, 원나라는 고려,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하였다.

 

1636년 청나라의 침공으로 벌어진 병자호란.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였다면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조선이 청나라와 마짱 뜰 능력이 없었으니 어차피 청나라의 제후국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전에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고 조선 개국이래 살아왔으니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모셔도 별로 억울할 것도 없었다. 다만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서는 오랑캐라 칭한 청나라와 국운을 걸고 치열하게 싸워 졌다면 별로 억울하지 않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보고 처절하게 짓밟힌 다음 조선 임금이 오랑캐라고 천시했던 청나라 황제에게 삼전도에서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에 박으며 항복했고, 50 여 만 명의 조선 백성이 이역만리 대륙으로 끌려갔으니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가? 그럴바에야 당시의 국제정세에 따라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했더라면 백성을 전화에 몰아넣지 않고 실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청나라로 끌려간 여자들도 댓가는 혹독했다. 대부분 만주족의 첩으로 들어갔는데 본처가 질투를 하여

끓는 물을 끼얹기도 하고, 요행히 고국으로 돌아와도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당해 파혼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지금 몸을 파는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하는데 그 어원이 바로 환향녀(還鄕女), '고향에 돌아온 여자'에서 나온 말이다.

나라에서, 남자들이 지켜주지 못해 더럽혀진 몸 그것이 어찌 그녀들의 잘못이란 말인가?

 

이런 가슴아픈 역사가 있는 곳 이곳 심양에서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심양은 지금 공사중.....

 그러다 보니 자기 이력을 표시하는 간판을 걸어놓고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

 

 공사로 인한 희뿌연 하늘과 탁한 공기와 바람으로 낮에는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는것이 좋다

 

 

 

 

중지에 ...백화점과 상가점들이 모여있는 중심가이지만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모호한 장면을 자주 보게된다

 

 

 

 

-五爱市场(우아이스창): 오애시장..소상품성 및 복장성,씨에청,한국성 등등..의류잡화의 도매 천국

심양가면 무조건 가볼것~ ㅎㅎ 전자상가포함

 

 

자전거의 쓰임새가 참 다양하다 .

 

 

 

 

 저녁을 먹기위해 목적지까지 약 30여분을 걸어서 간다.

이곳은 외국인 전용 팝레스토랑이다...

피자와 칭따오 맥주로 간단하게 저녁 해결 ^*^

 

 

 

 

 

늦은 저녁 심양에서의 낯선 밤풍경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마운틴 현장 사무실 지상의 아파트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25층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가끔씩 생각날것 같다,

 

 

 

선양고궁 [瀋陽故宮(심양고궁)]

지하철 中街(중지에)에 내리셔서 5분거리,,,,

심양 고궁은 청태조 누루하치와 그의 아들 청태종이 지은 황궁으로, 1625년에 짓기 시작하여 청나라 숭덕(崇德) 원년(1636)에 완공되었다. 심양시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것으로는 북경의 고궁 다음으로 큰 궁전건물이다. 90여 개의 건물에 300여 칸에 이르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으로 지은 지 387년이 넘는 현재까지도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 건물 안에는 당시의 의상, 보물, 문화재, 무기 등이 원형대로 전시되어 있다

 

북경에 있는 것보다는 아늑한 분위기의 이곳은 만주족, 한족, 몽골족의 건축문화를 한데 혼합해 놓은 것에 그 가치가 있다. 특히 색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만주족의 습성이 많이 반영되어, 심양 고궁은 북경의 고궁과는 달리 청색 등 다양한 색이 사용되었다. 또한 각각의 건물들에는 당시의 궁정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보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내부는 동·중·서로로 크게 나뉘고 출구는 남쪽에 있다. 동로에는 고궁을 대표하는 대정전(大政殿)이 있는데, 황제와 신하들이 정무를 보던 곳이다. 중로에는 숭정전(崇政殿), 봉황루(鳳凰樓), 청령궁(淸寧宮) 등의 주요 궁전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숭정전은 2층 팔각형이 특징이며 특별한 의식이 있거나 알현할 때, 봉황루는 연회가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 서로에는 황제의 도서관이나 무대가 있고, 후세에 건룡제가 증축한 문소각(文遡閣)도 있다.

면적은 약 6만㎡이며, 72만㎡인 자금성(紫禁城)에 비하면 12배 이상이나 규모가 작다. 수도의 황궁으로 건립되었으나 3대 황제 성종(成宗) 때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한 뒤로는 황제가 둥베이[東北] 지역을 순회할 때 머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1955년 선양고궁박물관[瀋陽故宮博物館]이 되었고,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포함되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궁전 내부는 크게 동로(東路)·중로(中路)·서로(西路)로 나뉘며, 모두 90채의 건물과 20개의 정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로에는 황제와 신하들이 정사를 논하던 대정전(大政殿)이 있고, 대정전 앞에 좌우로 각각 5개의 정각이 있는데 이를 십왕정(十王亭)이라 한다. 중로에는 선양고궁의 정문인 대청문(大清門)을 비롯하여 숭정전(崇政殿)·봉황루(鳳凰樓)·청녕궁(淸寧宮)·동소(東所)·서소(西所)·태묘(太廟) 등이 있다. 서로에는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수장된 문소각(文溯閣)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전통과 규칙을 중시하는 한족(漢族)의 건축물과는 달리, 북방 기마민족으로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만주족(滿洲族)의 특성이 건축기법에도 반영되어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심양의 고궁을 지을 때 청 태조 누르하치는 그 후손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에 입성하리라고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규모가 소박하고 아담하다. 북경의 자금성은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가 건축을 시작하여 명, 청 시대까지 계속 지어져 오늘의 모습이 되었지만 명나라 시작된 규모에 청나라 기풍이 더해져 지금의 자금성이 되었으니 심양고궁과 닮은 것이다

 

 

 어척이 없다,,,,입구에서 광각렌즈로 바꾼다는것을  잊어버렀다.

 결국 단렌즈로 중국을 담는다 ,,,

 

 

심양고궁 바로 옆의 극장. 조본산(赵本山)과 소심양(小沈阳)이 공연하는 극장이다.

우리나라 예전 만담같이 2명이 진행하는 극이 있는데 조본산(赵本山)이 2인극의 대표적인 사람이다

중국인은 어린아이도 조본산(赵本山)과 소심양(小沈阳)을 안다

 

 

 

문소각(文溯阁)

1782~1783년, 건륭제 48년에 지어진 것으로 <사고전서 四庫全書>를 보관하는 일곱 곳 중의 한 곳으로 책을 보관하던 도서관이다. 심양고궁의 다른 건물과 뭔가 다르지 않은가? 모든 건물은 황금색이나 붉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이 건물은 녹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유는? 방화도료란다.

 

 

 

 

 

 

숭정전(嵩政殿), 심양 고궁의 정전(正殿)이다

1625~1635년 청 태종 시절 지어졌고, 청 태종 홍타이지가 이곳에서 조회를 했으며 외국 사절들을 맞이했다

正大光明(정대광명)이란 편액은 청나라 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가 썼다

 

 

 

 

 

 

 

 

 

 

 

 

 

 

대정전(大政殿)

대정전(大政殿)은 심양고궁에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1625년 청 태조 누르하치가 세웠는데 이곳에서 대전의식을 거행했으며 칙서를 반포하고, 군사 출정 선포, 개선군 환영행사, 황제 즉위식 등이 열렸던 곳으로 청나라는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겼던 정전이다. 실제로 청나라 두 번 째 황제인 태종 홍타이지도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대정전 앞 쪽 좌우로 <십왕정十王亭>이 있다. 십왕정은 좌익왕(左翼王), 우익왕(右翼王)을 비롯하여 팔기군이 늘어서 있는데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정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 팔기군이다. 팔기군은 청나라 군대를 8개로 나눈 군사단위로, 최초에는 기마민족인 만주족이 사냥하던 제도에서 따온 것으로 만주족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가 나중에 한족, 몽고족도 팔기군 편성에 포함시켰다.

 

팔기군의 깃발은 1642년에 확립되었으며 그 중 정황기(正黃旗), 양황기(鑲黃旗), 정백기(正白旗)는 황제 직속부대이며 나머지 5개인 양백기(鑲白旗), 정홍기(正紅旗), 양홍기(鑲紅旗), 정남기(正藍旗), 양남기(鑲藍旗) 등은 제후들이 지휘했다.

 

 

 

 

 

 

 

 

 

 

 

 

 

 

 

 

 

 

 

 

 

 

 

 

심양에서의 접근성과 주변 관광지가 인접해있어 추후 개발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

 

 

 

 

 

 이곳에도 여지없이 텐트가 ㅎㅎㅎㅎㅎ

 

 

 

 

 

요녕 본계수동(辽宁 本溪水洞) : 요녕 본계시 물의 동굴

 

료녕성 본게시 동쪽 교구에 위치해 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풍경지로 불리는 본계수동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가장 큰 동굴이며

세계에서 제일 긴 지하 충수용 동굴이다.

 

아침에 심양을 떠날 때는 약간 흐렸는데 1시간 정도 달려다 보니 잎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비가왔다

목적지인 본계에 도착할때쯤  비가 그치고 신선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하었다.

 

본계수동(本溪水洞) 약 5억 7천만 년 전에 바다였던 곳이 수 백 만년 전 지각의 변동으로 동굴이 형성되어 동굴 남북으로 물이 흐른다. 대략 면적은 42.2km2 정도로 내부에 40여 척의 보트가 관광객을 태우고 약 20여 분 왕복으로 운행한다.

 

 

 

 

 

 

 

 

 

 

 

 

 

 

 

중산광장(中山廣場)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선양시(瀋陽市) 허핑구(和平區)의 중산로(中山路)와 난징가(南京街), 베이쓰마로(北四馬路)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광장으로 면적 2만 6400㎡이다. 1913년 중양광장(中央廣場)이라는 명칭으로 건설된 뒤 1919년 랑쑤광장(浪速廣場)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중국국민당 통치 시기에 중국혁명의 선구자인 쑨원(孫文)의 호를 따서 중산광장(中山廣場)으로 개칭되어 선양이 해방될 때까지 사용되다가 문화대혁명 시기에 훙치광장(紅旗廣場)으로 바뀌었고, 1981년 중산광장의 명칭이 회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단둥은 '동쪽을 붉게 물들인다'는 뜻이다.

옛 이름은 안동이었으며, 1965년에 단둥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압록강 하구부의 신의주 바로 맞은 편에 있으며 신의주와는 철교로 연결되고 있다.

고대로부터 한반도와 만주, 중국을 잇는 길목이어서, 역사상 한중 관계의 많은 사건들이 단둥에서 벌어다.

고구려가 조위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자 공략했던 서안평이 단둥에 있었으며, 고구려의 견관 방어선을 뒤흔들기 위한 당군의 기습도 이곳에 가해졌다

또한 단둥과 신의주 사이에 있는 위화도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첫 걸음을 내디딘 곳이기도 하다.

 

'동양 제일의 국경 명물'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압록강 철교는 1950년 한국전쟁 도중 폭파되었다

지금 이 다리는 당시의 상흔을 간직한 채 압록강단교(斷橋)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당시 중공군이 전쟁 개입을 결정하면서 압록강철교가 군사 요충지로 부각되어 미군의 B-29가 폭격했기 때문이다.

압록강철교에서 상류 쪽으로 70m 지점에 신철교(新鐵橋)가 복선으로 건설·개통(연장 943.3m)되었는데,

외길이라서 오전에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오후에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차들이 통행한다.

 

 

 

 

 

 

해군의 AD-3 급강하 폭격기가 20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하고있다. 사진의 장소는 신의주에서 북한과 만주를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이며 왼쪽이 북한 지역이다. 폭격은 북한쪽의 철교부분을 폭파시키고있다. 사진의 왼쪽에 달 분화구 같은 많은 폭파구가 보인다. 그 동안 많은 폭격이있었음이 확연하다. 1950년 11월의 사진이다. 이러한 공중 공격작전이 중국을 자극하게되고 중공군의 개입빌미를 제공한다 [ 윗 사진 ]

 

 

 

 

 

 

 

 

 

 

 

 

 낯선 거리 풍경과 익숙치 않은 북한 음식점들,,,,

 

 

 

 

 압록강 철교를  배경으로 이번 투어에 참석한 회원님들 ,,,,

 

 

 

 

 

 

 

 

 

 

 

 

 

 

 

 

 

 

 

 

 

 

 

 

 

 

 

 

 

 

 

 

 

 

 

 

 

 이번 심양 방문의 목적지인 곳으로 간다....

 푸른 풀빛 저수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고 좋은 곳이다,,,

도로와 주변이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곳이지만 나중엔 별장부지가 들어서겠지....

 

숙소로 돌아오니 마침 결혼식이 있었나 보다 ,,,,많은 결혼 축하 차량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

 

 

 

 

 

 

 

 

 

 

 

 

 

 

 

 

 

 

 

 

 

 

 

 

 

 

 

 

 

 

 

 

 

 

 

 

 가끔은 누군가가 현지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콜~라이 ㅎㅎㅎ

 

 

 

 

 비온뒤 아파트 창문을 통해 찍은 사진이다.

 개인적으로 색감이 제일 마음에 든다 .

 

 이번에 통역과 운전을 하면서 마음 도움을 주었던 선생님 ㅎㅎㅎㅎ

 

 

 

 

 

 다음날 아침은 현지식으로 해결,,,,

한끼에 30위안 한국돈으로 600원이 되지 않는다.

 

 

 

 

도심 한컨에 있는 공원,,,

한강처럼 넓은 수로를 끼고 있다

 

 

 

 

 

 이곳 강태공의 뒷모습에서 이곳의 현재 모습이 느껴지는것 같다

 

 

 

 

 

 

 

 

 

 

떠나기전 보다 돌아온 지금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처음경험해본 일들이 많아서 그런가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것 같다.

 

그리고  처음부터 마지막 떠나기 전까지 여러가지로 애써준 마운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대 트릭아이 미술관 [2013년7월20일]  (0) 2013.07.22
홍대 나들이 [ 2012.10.29 ]  (0) 2012.10.30
2012년 캐나다의 봄 6편  (0) 2012.03.29
2012년 캐나다의 봄 5편  (0) 2012.03.29
2012년 케나다의 봄 4편  (0) 2012.03.29